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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SSERAFIM [UNFORGIVEN]

본작은 LE SSERAFIM(이하 르세라핌)의 정규 1집이다.

르세라핌은 HYBE 레이블 산하 쏘스뮤직 소속의 5인조 걸그룹이다. M-Net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사쿠라, 김채원, 허윤진이 주축이 되어 뉴페이스 카즈하, 홍은채, 김가람과 함께 총 6명 구성으로 출발했다.

이들의 데뷔 EP FEARLESS는 괜찮은 비주얼과 사운드로 주목받았지만 “왜 FEARLESS인가?”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김가람은 본인의 논란으로 인해 데뷔 활동조차 매듭짓지 못하고 탈퇴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역경을 극복하며 성장했다. 두 번째 EP ANTIFRAGILE에서 자신들은 맞을수록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며, ‘어디 한 번 날 부숴보’라고 도발한다. 특히 타이틀곡 가사 중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시 마 내가 걸어 온 커리어’는 유명 멤버 사쿠라, 김채원의 성장 서사와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카즈하가 걸어온 길을 조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은 이전에 지적받았던 스토리텔링 문제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고, antifragile이라는 말처럼 본인들이 처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냈다. 비록 해당 내용이 데뷔 이전 시점부터 준비되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본작 UNFORGIVEN은 이러한 서사 위에 세워진다.
본작은 서(序)-파(破)-급(急)의 3막 구조를 띈다. 1~3번 트랙과 4~6번 트랙은 앞선 EP들의 인트로-타이틀-서브타이틀로 구성되어 있으며, 7~13번 7개 트랙은 신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내레이션 트랙 아래에 나머지 곡들이 영향받고 있는 형태다. “우리들은 FEARLESS해”(서), “어디 한 번 날 때려봐, 나는 ANTIFRAGILE하니까”(파), “우리는 모든 것을 태우고 새 시대가 될 거야, 구시대의 용서는 필요 없어”(급)으로 서사가 이어진다.
Burn the Bridge는 본작의 인트로 트랙이다. 이 곡에서는 이들이 왜 르세라핌으로 모였는지,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여기에 매력적인 기타 리프가 내레이션의 진솔함을 한층 강화한다. 가사는 멤버들이 이전에 인터뷰와 글로 뱉었던 말들을 한데 엮은 형태다. 이 곡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김채원의 가삿말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감 / 내가 결정했을 때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곡의 도입부 독백으로 삽입해 그룹의 테마를 부각한다. 후반부 ‘우리, 저 너머로 같이 가자’ 라인에서는 각 멤버들이 모국어로 반복해 말하여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Burn the bridge Burn in all よく見て、/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태워 빛이 될 거야’라는 가사에서는 금기시되는 일들(forbidden)을 파괴하고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We are unforgiven’이라는 가사로 노래를 끝맺으며 용서받지 못한 자(unforgiven)가 될 것을 선언함과 동시에 다음 트랙인 UNFORGIVEN으로 넘긴다.
UNFORGIVEN은 본작의 타이틀곡이다. 먼저 Nile Rodgers의 기타 피처링과 석양의 무법자 OST 샘플링이 눈에 띈다. 후자는 예상한 것만큼 쉽게 찾을 수 있으나, 아쉽게도 전자는 기대한 것과 달리 특별하지 않다. ‘Nile Rodgers 로고 플레이’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달라지기에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제는 보컬 라인과 가사를 살펴보자. ANTIFRAGILE부터 이어져 온 ‘Unforgiven I’m a villain I’m a’ 파트의 말맛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LE SSERAFIM-대물림-rebellion, clown-나다움-loud, ‘Unforgiven unforgiven unforgiven / 한계 위로 남겨지는 우리 이름’에서 라임의 사용은, 구조가 좀 뻔하긴 해도 팝 장르이기에 괜찮다고 본다. 메인 훅에서 뜬금없이 대중성을 챙기기 위해 어색한 파트를 집어 넣어 곡의 매력을 떨어뜨린 부분은 실망스럽다.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는 독특한 제목과 더불어 낮고 강하게 울리는 하우스 비트가 인상적인 곡이다. 곳곳에 들어간 보컬 샘플들도 곡의 분위기를 한껏 살린다. ‘Get it like boom boom boom’ 파트는 김채원이 굉장히 잘 살려주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멤버들의 퍼포먼스가 아쉽게 느껴진다. 가사면에서는 특히 허윤진 파트 가사들에서 단어 사용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성경과 신화, 동화 속 금기를 어긴 인물들을 가져왔으나 이들의 분량은 단 몇 줄에 그친다. 대신 빈 자리를 상대적으로 무의미하고 감정적인 단어들(mess, boom)을 반복시켜 채워냈는데, 이 점이 중독적이고 아름다우면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외에도 No-Return (Into the unknown)이나 Fire in the belly에서 보여주는 디스코와 라틴 팝 장르, 겨울왕국과 원피스 같은 유명 애니메이션들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들도 눈에 띈다. 특히 Fire in the belly는 라틴 팝 장르의 차용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가사까지 등장하는데, 이는 방시혁이 K-Pop의 세계화와 관련하여 아프로 팝과 라틴 팝을 이야기했던 인터뷰를 떠오르게 한다. 각 멤버의 모국어(한국어, 일본어, 영어) 외의 언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트랙 구성은 아쉽다. UNFORGIVEN 이후부터는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계속 끊어진다는 게 문제다. 앨범의 초중반부에 이전 EP들의 트랙이 들어있는 구성에 대해 성의 없는 곡채우기라고 비판하기도 하나,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구성은 정규 1집을 통해 5인조 르세라핌으로 시작하겠다는 의미도 있고, 서사의 유기성을 보여주려는 의미도 지닌다. 앞의 트랙들을 제외하고 듣고 싶다면 앨범의 7번 트랙부터 플레이할 수도 있고, 재생목록을 만들어서 들을 수도 있다.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본 앨범으로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리패키지 또는 베스트 앨범으로써 구매 욕구를 올리기도 한다. 실보다 득이 훨씬 많다고 본다.

UNFORGIVEN의 뮤직비디오에서 탐미적인 면을 부각하는 건 좋지만, 정말 다양한 것들을 집어넣느라 조금 과하게 다가온다. 특히 화살 쏘는 장면에서 중간에 흐름을 오래 끊는 건 이런 안무와 화면 중심의 뮤직비디오에서 독이 된다.

앨범 아트는 앞선 두 EP의 앨범 아트가 무너져내린 위로 홍염(炎)이 뒤덮는 형태다. 주제 의식을 미니멀하게 부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다.

결론적으로 본작은 욕심이 많은 앨범이다. 앨범 구성에 서사를 길게 집어넣었다. 앨범의 3막 구조에서도 느껴지고, 앨범의 주제를 설명하는 Burn the Bridge가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트랙임에도 불구하고 FEARLESS와 곡 길이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는 것에서도 느껴진다. 다양한 장르의 차용도 그렇다. 여러 시도들을 했으나 최종적으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앨범의 흐름이 끊어진다. 모티프도 다양한 곳에서 가져왔다. 멤버들의 인터뷰와 글, 영화 OST, 각종 옛날 이야기들 등등. 뮤직비디오 또한 죽 보고 있으면 이들의 욕심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이러한 것들이 핵심을 흔들지는 않았다.

관성적으로 그어 놓았던 정지선 위로 호기롭게 발을 내딛는다. 아무도 가지 않은 흐린 안개 속에 들어선 이들의 색깔은 전보다 흐릿하게 보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들은 여전히 르세라핌이다.

★★
추천 트랙: Burn the Bridge,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 Fire in the belly

* 이 글은 2023년 6월 18일 한 차례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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