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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지노(Beenzino) [NOWITZKI]

본작은 빈지노의 정규 2집이다.
 
7년만의 정규 앨범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재지하고 섹시했던 “젊음.”을 이제 조금씩 놓아줘야 한다고 느끼는 듯하다. 이번 앨범은 빈지노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간 담아 왔던 이야기를 꺼낸다. 단지 이전과 조금 달라진 목소리가 지나온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한다.
 
참여진에 정말 많은 변화가 있다. 지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과거의 인연들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현재 몸 담고 있는 소속사 BANA의 프로듀싱이 두드러진다. 우선 같은 BANA 소속으로는 앨범 ‘Dog’으로 강한 개성을 보여주었던 김심야와, 앨범 ‘뽕’으로 존재감을 뽐냈던 250이 참여했다. BANA와 함께 작업했던 Cautious Clay, Y2K92(Simo와 Jibin), 백현진도 보인다. 피쳐링진에서는 Kendrick Lamar와 함께 작업했던 Lance Skiiiwalker, 앨범 ‘For The Poser’로 힙합 씬에 눈도장을 찍었던 oygli 등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프로듀서진에는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신중현 사단 김정미의 명반 Now의 1번 트랙인 ‘햇님’을 샘플링했다)을 포함해, DPR CREAM, Slom, Mokyo, HOLYDAY와 같은 국내 이름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트메이커 AMARAH Beats, Sharafat Parwani, Argov, K.Mckirdy, Katlego Tladi 등으로부터 구매한 듯한 비트들도 있고, 여기에 스웨덴의 송캠프에서 만난 DICIO, Ben Esser, Farhot 등도 함께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결과, 빈지노가 가지고 있던 무드와 여러 참여진의 스타일이 섞여 Chill한 분위기의 앱스트랙트 힙합 앨범이 완성되었다.
 
타이틀곡인 여행 Again (Feat. Cautious Clay)을 먼저 이야기하자. 빈지노의 톤이 깔끔한 발성과 공간감 있는 더블링에 힘입어 곡을 이끌어간다. 가사는 제주와 뉴욕의 순간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불러들인다. 가사와 라임의 사용부터 특유의 래핑에 통통 튀는 비트까지, 아마 우리가 기대하던 빈지노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트랙이라는 생각이 든다.
빈지노 특유의 바이브를 느끼고 싶다면 침대에서/막걸리가 제격이다. 두 곡을 붙인 구성, 재지하고 펑키한 비트는 마치 Tyler, the Creator처럼 솔직하고 감수성이 넘친다. 침대 위에서부터 뒹굴거리며 시작하는 나른한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다양한 생각과 감상들이 펼쳐진다.
990 (Feat. 김심야)에서는 피처링한 김심야가 돋보인다. 재지한 비트 위에 ‘굽이 굽이’라는 말이 반복되며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곡의 앞부분에서는 990이라는 숫자가 빈지노의 패션 아이템으로 비유되는 여유로운 삶을 보여주지만, 곡의 뒷부분에서는 김심야가 외모 재산 학력이 우선시 되는 사회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또, 빈지노는 뉴발란스 990이라는 제품명을 통해 패션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반면, 김심야는 Sudra, 나무아미타불, 열반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불교(혹은 불교 철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이렇게 두 실력파 래퍼가 990이라는 단어를 통해 정반대되는 내용과 형식을 보여주는 점이 인상 깊고, 특히 중독적인 플로우가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
바보같이 (Feat. Y2K92)는 본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사를 가지고 있다. Y2K92의 발성과 단조로운 멜로디는 반복적인 비트를 강조하고, 전체적으로 의미 없이 난잡한 흐름의 가사들도 비트를 찾게 만든다. 무드를 즐기며 곡을 듣다 보면, 갑자기 톤 다운된 멈블랩이 등장해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냥 냅다 갈기는 거지 무슨 자기계발서를 읽고 앉아있어’, ‘마치 성공에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드는 새끼들이랑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으면 난 진짜 존나 답답한데’, ‘그런 거 듣고 앉아있을 땐 난 솔직히 내 밥이 언제 나오는지가 제일 중요한데 말이야 그치’라고 하며, 왜 자신이 바보같이 해 왔는지, 왜 계속 바보같이 하라고 말했는지 이유를 말한다.
CampSanso (Interlude), Gym은 사운드가 인상적인 트랙들이다. Camp의 친절한 드럼과 박수 샘플, 브라스는 그가 보낸 군생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Sanso (Interlude)의 어쿠스틱 기타 리프도 차를 타고 산소로 향하는 모습을 쉬이 연상시킨다. Sanso (Interlude)의 마지막 부분과 Gym의 도입부 ‘노천온천 김 모락 모락 / 하얀 설경 구경 설경구야’ 라인에서 하이 피치를 활용하여 노스탤지어를 그리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Intro 다음 바로 놓이는 트랙 Monet는 그가 BANA에 합류하면서 제일 처음 낸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대표하는 곡으로 보아도 괜찮아 보인다. 형태가 불분명한 가사 속에서 느껴지는 재지한 바이브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아트웍들을 전시해 놓은 듯하다. 물론 이 씬의 모네는 MF DOOM과 Madvillain이겠고, 최근에도 Earl Sweatshirt, billy woods, Navy Blue, The Alchemist, Cities Aviv, Mach-Hommy, MIKE 등이 같은 화풍으로 훌륭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러나 ‘국힙 씬’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앱스트랙트 힙합과 재즈 랩으로 기획전이 열린 적이 있었나? 당장 떠오르는 건 김심야와 쿤디판다 정도다. 그러나 이들의 파급력을 고려한다면, 2020년 김심야의 ‘Bundle1’과 ‘Dog’는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빗댈 수 있겠고 2021년 쿤디판다의 ‘The Spoiled Child’는 같은 작가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래서 본작이 과감하게 꺼낸 거장의 이름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Show me that real Monet / Not that monitor 안에 / 어디서 나한테 사길’이라는 가사 말미의 ‘사길’도, 사기를 치려해도 안 통한다는 뜻에서만 머물지 않고 ‘나한테서 사가라’는 뜻으로도 들려온다.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중후반부의 조금 늘어지는 구성, 부담스러운 커버 아트, 본 앨범에 수록된 Trippy (Feat. Lance Skiiiwalker)보다 선공개했던 하이 피치의 Trippy가 더 좋았다는 점 정도다. 그래도 러닝 타임이 1시간에 육박하는 앨범치고 지루함이 덜한 편이며, 커버 아트나 피치를 올리지 않은 Trippy도 앨범의 분위기를 녹여내기 위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의 흐름대로 라임을 맞추는 모습은 chill하고, 그가 그간 보내왔던 단편적인 순간들은 반짝반짝 빛난다. 새로운 동료들의 참여도 앨범을 풍성하게 만들었고, 실험적인 면모들이 기존의 모습과 어울려 밸런스를 맞췄다. 국내 힙합 씬에서 오랜만에 인상적인 작품이 나왔다.
 
★★★★☆
추천 트랙: Monet, 침대에서/막걸리, 여행 Again, 990, 바보같이, G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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