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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

음잘알에 대한 생각

droplet92 2023. 12. 27.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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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은 어느 사람들에 대해 존경의 의미를 담아 '영잘알', '음잘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잘알' 이라는 postfix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지만,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음잘알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음잘알이라는 표현은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의 준말입니다. 언어 분석 철학의 관점에서 세 단계로 단어를 쪼개어 생각해보면, '음악'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우리네를 가리키는 단어이니 제외하겠습니다.

 

음악도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깊게 들여다 보면 살짝 애매합니다. 어디까지를 음악이라고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의 소리를 레코딩한 것도 음악으로 볼 것이냐, 노이즈도 음악이냐, 4:33도 음악이냐, 그냥 말하는 것도(스포큰 워드) 음악이냐, 사람에 따라 어떤 것은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 음악은 이들 모두를 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짝 애매하다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대 음악은 '음 그래그래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음악이야' 라고 하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 싶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것도 종결이 된 주제이니 넘어가겠습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굉장히 어려운 주제입니다. 기억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종종 과거의 기억을 사실과 다르게 가지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고, 보편적인 무결성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인류 지식의 구축이고 앎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단순히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앎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겠고, 가지고 있는 정보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앎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만약 시험 문제를 깜빡 실수해서 틀렸다면(계산 실수를 했다거나, OMR 카드를 밀려 썼다거나 등등) 그건 모르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너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입니다.

 

'잘'이라는 표현은 '안다'는 표현을 앞에서 수식해서 그 정도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어떤 측정 가능한 value가 특정 threshold를 넘었음에 대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threshold는 어디쯤에 놓여있는 걸까요? 음악에 있어 절대적 지식이 100이라고 했을 때, 50을 넘으면 잘 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음악의 절대적 지식 바운더리는 어디까지일까요? 애초에 인류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가변적으로 증가하지 않고 고정적인 걸까요?

 

이쯤에서 우리는 음잘알이라는 표현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의미가 언어의 분석과는 조금 핀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음잘알이라는 표현은 절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해당 표현이 사용되는 context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누가 누구에게 음잘알이라고 했냐가 중요하다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음악이라는 바운더리, 잘 안다는 threshold는 화자를 기준으로 대상자를 지칭하는 표현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화자가 'ASMR은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ASMR 마니아인 철수를 보고 음잘알이라고 지칭할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화자가 '反社会的サンダル의 うさぎちゃん은 너무 좋은 노래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하다고 생각한다면, 인스타 스토리에 이 노래를 공유한 친구를 보고 '反社会的サンダル 아시는구나!' 라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음잘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면 단순히 듣도 보도 못한 노래들을 카카오톡 프뮤로 설정한 친구를 보고 음잘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작곡이나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을 보고, TV에 나온 음악평론가를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메타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루에 발매되는 음악의 길이가 하루의 길이보다 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전 세계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없음을 전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음악을 듣는 것이 불가능하니 '좋은 음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음잘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당연히 좋은 음악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내리는 지도 화자마다 다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는 지를 음잘알의 판단 기준으로 볼 수도 있겠고, 폭 넓게 수용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태도를 음잘알의 판단 기준으로 볼 여지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추천해 주는 음악 타율이 70%는 된다'던가, '내가 어떤 장르 이야기를 해도 이야기가 통한다'던가 등등.

 

그런데 음악의 청자가 자라 온 환경에 따라서, 심지어 그 곡을 들을 당시 수용하는 상태에 따라서도 흔히 명반이라 불리는 앨범을 별로라고 판단할 수 있고 좋은 소리 못 듣는 노래에 대해서 세기의 명곡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성장 환경이나 배경지식같은 이야기는 이제 당연하고 진부하니 넘어가고, 흔히 간과하는 듯한 수용 상태에 대해서 짧게 적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배가 고픈데 음악이 귀에 들어 올까요? 큰 맘 먹고 여행 간 유럽의 어느 재즈 바에서 한껏 달아오른 상태로 처음 만난 가수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 기분이 푹 꺼질 수 있을까요? 연인과 헤어진 후에는 듣지도 않던 '술라드'가 마음에 푹 박힐 거고, 야근 후 돌아와 침대에 누워 평소에 좋아하던 클래식을 틀었다면 십중팔구 prelude도 어디까지 들었는지 기억도 못한 채로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할 겁니다.

 

사람의 수만큼 음잘알에 대한 판단 기준이 존재하겠죠. 아니, 음잘알이라고 말하는 화자들도 특별한 기준이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추상적이면서도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음잘알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표면상의 의미보다 이 의미를 사용하는 이유가 더 중요하니까요. 음악이라는 대화 주제가 나왔을 때 누구를 칭찬하기 위해서, 아니면 조소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니까요. 누가 '진짜 음잘알'인지 옥석을 가리는 일보다 무슨 의도로 사용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더 필요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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