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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게다가 술까지 마셔버리는 바람에 벌써 많은 기억이 날아가버린 것 같지만, 결국 행복하다면 OK 아닐까요? 중간 MC로 "여러분, 행복하시죠?" 라고 말이 기억 나네요.

 

에이트레인(A.TRAIN) 님은 워낙 노래 잘 만드시고 - 한국대중음악상도 타셨고! - 노래도 잘 부를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만, 여태까지 정말정말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안 맞아서 라이브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당장 T Factory 공연을 못 갔던 게 생각 나네요. 염원하던 라이브를 볼 수 있던 것만으로도 우선 좋았습니다. 첫콘이 의미 있는 첫 단콘이라니 오히려 좋아.

 

공연에서 첫 번째로 받았던 인상은 새삼스럽게도 사운드가 다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이트레인 님을 떠올릴 때는 주로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앨범 PAINGREEN을 떠올리게 되고,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톤이 일정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대충 말하면 유기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단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NAKED ODYSSEY라던가, PLEASE SOMEONE 같은, 우울하고 종교(천주교)적이고 알앤비고 공간감이 느껴지는 것들 말이죠. PRIVATE PINK를 소홀히 했던 것도 맞지만 그 이상으로 이번 라이브 편곡이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일렉 기타가 막 '잡아먹을 듯'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에이트레인이 발을 구르면 그 진동이 제 자리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첫 곡에서 놀랐던 건 드럼과 보컬을 제외하고는 전부 전자 악기여서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농담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요샌 미디로만 곡을 찍고 라이브에서는 패드나 마스터 키보드, AR로만 사운드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밴드라는 게 원체 전자 사운드를 많이 쓰기도 하니까 새로운 건 아니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비중이 컸구나 했습니다. 이후에는 피아노랑 색소폰도 나왔지만요.

 

다양한 사운드만큼이나 다양한 뿌리들이 보였습니다. 알앤비니까 블랙 뮤직이지 하고 쉽게 생각했는데 어떤 곡은 락처럼, 어떤 곡은 팝처럼 만들어지고 앞서 언급했듯 종교적인 부분도 있고 고통을 다루는 가사와 목소리는 동양적이기도 하고 모티프는 서양 신화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고... 커야 돼 최엘비 파트 랩도 직접 하셨고! 그러면서도 이 모두를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에이트레인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부분이 새삼 문득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가정통신문 (Feat. 이혜지, 서보경)' 같은 트랙을 들으면 '아 정말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티스트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한림대병원' 같은 트랙은 그걸 뛰어넘어 모든 것을 끄집어서 내어준다고, 가수조차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곡을 만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마주보면 좋을까 하고 저 스스로 조심스러워지다 끝에는 그저 박수만 치는 무대였습니다. '식물 (Feat. 시문)' 무대를 보면서, '엄마의 엄마'를 내팽개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과 죽음과 제사까지를 다루는 곡에 경쾌한 박자, 밝은 소리와 색소폰 연주, 신나게 춤추는 모습에서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 개인적으로 2주 전에 돌아가신 '엄마의 아빠'의 장례를 치르면서 느꼈던 것들도 떠올랐고, 굿이나 살풀이 같은 것도 생각 났고, 최근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도 제목에서 연상이 됐고 그렇습니다.

 

같이 무대를 꾸렸던 밴드 분들 다들 너무 잘하셔서 (제가 이름을 서보경 님밖에 몰라서 흑...) 인상적이었고, '상처의 흔적'(정확한 표현인지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 유령 역으로 무대의 비주얼과 상징으로 기능해주셨던 것도 기억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클럽온에어는 두 번째 방문하는 공연장이었는데 객석과 무대가 가까운 점은 참 좋은 것 같아요.

 

PAINGREEN CD에 사인도 받았습니다 ㅎㅎ 정말 사랑하는 앨범이고 거짓말 안 하고 우울할 때나 슬플 때는 Blonde와 함께 찾게 되는 앨범입니다. 오늘 공연장에 오신 관객분들은 대개 PRIVATE PINK를 많이 이야기하셔서 말마따나 '명반만 내는 아티스트'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한대음이 이러나저러나 해도 국내 인디 음악에는 좋은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예정 시간을 다소 넘기고 막을 내린 공연 마지막에 '견딜 만큼만' 아파하고 '사실 나는 꽤나 괜찮은 사람일지도' 하고 생각하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처럼 두 곡이 두 앨범을 대표하고 있다고 봅니다. PAINGREEN의 메시지는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몇 번씩 살려달라고 빌었던 제 모습을 가엾이 보시고 리스너 분들에게 시련을 주시더라도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있게 해 주세요' 라고 생각하고, 공연장에서 하셨던 말처럼 자책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되지만 괜찮다고 생각해보는 건 가끔은 도움이 된다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화장터에 간 날 공동묘지에 수없이 핀 색색의 조화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슬픔이라는 건 아름다움이 아닐까 하고요. 망자들을 위한 공간에는 어여쁜 글귀들과 생전 웃고 있는 고인의 모습들로 삶의 행복했던 순간들만이 영원처럼 고여 있었거든요. 고통과 슬픔에 눈물 흘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면 그것을 비료 삼아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SCARBERRY 처럼.

 

공연 초반에는 조금 긴장하셨던 것 같았는데 그런 기색도 금세 사라져서 실력을 제대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공연비 전혀 안 비쌌고 오히려 첫 단독 공연이라고 준비 엄청 많이 하시고 이것저것 퍼 주셔서 받아가기만 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는 노래들을 많이 못 들었기 때문에 다음에 또 기회 되는대로 찾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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